300x250 시23 [도종환] 포클레인 포클레인 물줄기 하나라도 막지 않는다 산은 어느 곳으로도 물이 흘러갈 곳을 내어준다 그 그늘에 와서 살고자 하는 것은 풀벌레 꽃씨 하나라도 살 자리 만들어준다 벼랑가에도 둥지틀 곳 내어주고 바위 틈서리에도 뿌리내릴 자리 비워준다 짐승 한마리 절대 마구 내쫒지 않는다 도시 끝 버림받은 산비탈 동네에서라도 자식새끼 데리고 살아보려 몸부림치는데 아직 숟가락 들고 있는 어린아이 밥상을 포클레인으로 내리치는 광경을 이 시대 사람의 산동네에서 본다 곡괭이 자루로 사람이 들어 있는 집을 내리찍는 모습을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어린 꽃모가지도 짐승의 여린 발목도 다 부러뜨려 내쫒는 모습을 도종환 시집 '부드러운 직선' 중에서 2015. 10. 28. [도종환] 너의 싸움 너의 싸움 옛날엔 밖에 나와 싸우는 게 진짜 싸움인 줄 알았지 지금 너를 보니 안에서 싸우는 싸움이 진짜 싸움이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속 편하게 치고 빠지는 싸움은 겉멋에 지나지 않는 싸움인지 몰라 매일 얼굴을 대하고 속이 푹푹 썩어가며 그렇게 싸운 사람만이 진정으로 이길 수 있어 화살통을 메고 먼발치서 화살만을 날리는게 아니라 제 몸이 화살이 되어 날아가 박혀 온몸으로 끌어안고 뒹구는 사람들 좀 보아 우리는 어쩜 관전평이나 하고 입으로만 싸우면서 그 크나큰 모순들을 이길 것으로 믿어왔는지 몰라 싸움은 그래 너처럼 하는 거야 삶의 한복판에서 삶의 온갖 모순 질곡 그런 것들의 한가운데서 때로 얻어터지고 깨어지면서 그렇게 시원하게 그렇게 결판이 날 때까지 도종환 시집 '부드러운 직선' 중에서 2015. 10. 28. [도종환] 귀가 귀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 2015. 10. 28. [도종환] 종이배 사랑 종이배 사랑 내 너 있는 쪽으로 흘려보내는 저녁 강물빛과 네가 나를 향해 던지는 물결소리 위에 우리 사랑은 두 척의 흔들리는 종이배 같아서 무사히 무사히 이 물길 건널지 알 수 없지만 아직도 우리가 굽이 잦은 계곡물과 물살 급한 여울목 더 건너야 하는 나이여서 지금 어깨를 마주대고 흐르는 이 잔잔한 보폭으로 넓고 먼 한 생의 바다에 이를지 알 수 없지만 이 흐름 속에 몸을 쉴 모래톱 하나 우리 영혼의 젖어 있는 구석구석을 햇볕에 꺼내 말리며 머물렀다 갈 익명의 작은 섬 하나 만나지 못해 이 물결 위에 손가락으로 써두었던 말 노래에 실려 기우뚱거리며 뱃전을 두드리곤 하던 물소리 섞인 그 말 밀려오는 세원의 발길에 지워진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내가 쓴 그 글씨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음을 내 너와 함께하는 시.. 2015. 10. 28. [도종환] 강가에서 강가에서 강물이 우리에게 주는 소리를 더 오래 듣고 있어야 했다 강물이 흘러 아래로 가는 뜻을 다 아는 듯 성급하게 전하러 다니기 전에 가르치려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강물의 힘줄이건 멈추지 않는 빛깔이건 오히려 물줄기 만날 때마다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먼저 생각해야 했다 흘러가며 반짝이는 풀과 꽃들 만날 때마다 꽃으로 열매로 올라가려 기를 쓰지 말고 뿌리 쪽으로 소리없이 내려가야 했다 어디서 이 실패는 비롯되었는가 골똘해지기 전에 조금 고였다 싶으면 서둘러 바다로 이끌로 가려 한 건 잘못이었다 고여 넘쳐 저저로 흐름을 찾아갈 때까지 한사리 가득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2015. 10. 28. [도종환] 배롱나무 배롱나무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이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루하고 먼길을 갈 때면 으레 거기 서 있었고 지치도록 걸어오고도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할 때 고갯마루에 꽃그늘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접어들면 건너편에서 말없이 진분홍 꽃숭어리를 떨구며 서 있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만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어 혼자 외딴섬을 찾아가던 날은 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듯 늘.. 2015. 10. 28. 이전 1 2 3 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