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x250 시23 [도종환] 등 잔 등 잔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 심지만 뽑아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 그으름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타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 결국은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 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 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게 아니다 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 넘치면 나를 태우고 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 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 욕심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 내 마음의 등잔이여 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권 거뜬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도종환 시집 '부드러운 직선' 중에서 2015. 10. 28. [도종환] 칸나꽃밭 칸나꽃밭 가장 화련한 꽃이 가장 처참하게 진다 네 사랑을 보아라 네 사랑의 밀물진 꽃밭에 서서 보아라 절정에 이르렀던 날의 추억이 너를 더 아프게 하리라 칸나꽃밭 도종환 시집 '부드러운 직선' 누구나 자신의 가장 화련한 시절이 발등을 쿵 하고 찍을 때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내 뱉은 말이 부메랑이 돼 되돌아오거나 첫 사랑의 추억에 너무나 아플때가 그 때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그런 화련한 시절이 삶의 힘이 되기도 한다. 2015. 10. 28. [도종환] 다시 피는 꽃 다시 피는 꽃 가장 아름다운 걸 버릴 줄 알아 꽃은 다시 핀다 제 몸 가장 빛나는 꽃을 저를 키워준 들판에 거름으로 돌려보낼 줄 알아 꽃은 봄이면 다시 살아난다 가장 소중한 걸 미련없이 버릴 줄 알아 나무는 다시 푸른 잎은 낸다 하늘 아래 가장 자랑스럽던 열매도 저를 있게 한 숲이 원하면 되돌려줄 줄 알아 나무는 봄이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 변치 않고 아름답게 있는 것은 없다 영원히 가진 것을 누릴 수는 없다 나무도 풀 한포기도 사람도 그걸 바라는 건 욕심이다 바다까지 갔다가 제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제 목숨 다 던져 수천의 알을 낳고 조용히 물밑으로 돌아가는 연어를 보라 물고기 한마리도 영원히 살고자 할 때는 저를 버리고 가는 걸 보라 저를 살게 한 강물의 소리 알아듣고 물밑 가장 낮은 곳으로 말없이 .. 2015. 10. 28. [도종환] 숲 숲 산 발치에 있는 나무와 산 정상에 있는 나무가 함께 모여 있다 아랫말 젊은이 백발 될 때까지 지켜본 고목이 있고 꽃봉오리 처음 열고 이 나무 저 나무 기웃거리는 진달래가 같이 있다 짐승 발톱에 챌까봐 제 잎으로 가려주고 추위에 얼어죽을까봐 가지 꺽어 덮어주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봄날이 가기 무섭게 그 나무 친친 감아 오르며 까불대는 칡넝쿨 다래넝쿨도 있다 아주 아주 위태롭던 날 어둡고 슬프던 날 벼락을 대신 맞고 죽어간 나무가 있고 그 앞에 어린 순을 내미는 나무가 함께 있다 그 나무들 모여 숲을 이룬다 낙락장송 혼자 이루는 숲은 없다 첫서리 내리면 잎을 버리고 몸 사리는 나무와 한겨울 내내 푸른 빛을 잃지 않는 나무가 함께 모여 숲을 이룬다 작은 산 하나를 만든다. 2015. 10. 28. [도종환] 가죽나무 가죽나무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2015. 10. 28. [도종환] 부드러운 직선 부드러운 직선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도종환의 시집 '부드러운 직선' 중에서 이 시 처럼 휘어질 때는 휘어지더라도 원칙.. 2015. 10. 28. 이전 1 2 3 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