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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23

[도종환] 가죽나무

가죽나무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도종환] 부드러운 직선

부드러운 직선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히 추켜세운 추녀를 보라 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른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도종환의 시집 '부드러운 직선' 중에서 이 시 처럼 휘어질 때는 휘어지더라도 원칙..

[도종환] 운동의 추억

운동의 추억 도 종 환 추억으로 운동을 이야기하는 사람 많다 운동한 기간보다 운동을 이야기하는 기간이 더 긴 사람이 있다 몸으로 부닥친 시간보다 말로 풀어놓는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운동 현재가 없는 운동을 현재로 끌어오는 그 공허함 도종환의 시집 '부드러운 직선' 중에서 추억으로 운동을 얘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은 같다.

[도종환] 폐허 이후

폐허 이후 도 종 환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요즘 들어 내가 스스로 얼마나 먼저 나를 포기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다른 이들이 나를 함부러 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스스로 하게 된다. 앞으로는 내가 스스로 포기하는 일을 되풀이 하지는 말아야 겠다.

[도종환] 산맥과 파도

산맥과 파도 도 종 환 능선이 험할수록 산은 아름답다 능선에 눈발 뿌려 얼어붙을수록 산은 더욱 꼿꼿하게 아름답다 눈보라 치는 날들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놓은 외설악의 저 산맥 보이는가 모질고 험한 삶을 살아온 당신은 그 삶의 능선을 얼마나 아름답게 바꾸어놓았는가 험한 바위 만날수록 파도는 아름답다 세찬 바람 등 몰아칠수록 파도는 더욱 힘차게 소멸한다 보이는가 파도치는 날들을 안개꽃의 터져오르는 박수로 바꾸어놓은 겨울 동해바다 암초와 격량이 많았던 당신의 삶을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파도로 바꾸어 놓았는가 도종환 시집 '부드러운 직선' 중에서

[안도현] 우리 동네 오리온 공장

우리 동네 오리온 공장 안 도 현 우리 동네 오리온 공장은 내 추억 속 별 총총 어머니 졸라 사먹던 동양제과 비스켓 만드는 곳 흰 빵모자 쓴 어린 노동자들 파업중이다 요즘은 며칠째 과자 굽는 냄새 나지 않고 노조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사장에 맞서 싸운다 어깨에 어깨를 걸고 울며 부르는 노래가 빗줄기되어 동네를 적신다 노조를 만들었다고 나도 학교에서 쫒겨난 선생 가르치고 싶다 오늘은 우리집 아이에게 오리온 과자 한봉지 사주고 싶다 저 언니들이 붉은 머리띠를 묶는 저 손들이 바로 맛있는 과자며 빵을 만드는 손이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깨끗한 손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파업, 집회를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언론과 정권의 탄압이 그 원인이 있겠지만 그래도 서로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할..

[안도현] 민석이 백일 지나 밖에 안고 나가니

민석이 백일 지나 밖에 안고 나가니 안 도 현 민석이 백일 지나 밖에 안고 나가니 동네 어르신네들 하시는 말씀 있다 그 놈 참 잘도 생겼다 장군감이로구나 얼럴 얼럴러 깍꿍 그놈 참 미끈하게도 생겼다 대통령감이로구나 볼기짝 한대 철썩 그런데 그런 덕담도 어찌 내 귀에는 반갑게 들리지 않는다 민석아 나는 네가 먼 훗날 제발 장군이나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국을 지키는 일보다 정권의 들러리나 서는 장군이라면 부하에겐 늑대가 되고 상관에겐 쥐새끼가 되는 장군이라면 하늘의 별보다 어깨 위의 별에 눈먼 장군이라면 아직도 반공만이 살 길이라고 믿는 장군이라면 어느 땐가 때가 오면 혼란을 틈타 군복을 벗어던지고 싶어하는 장군이라면 학살을 하고도 피 묻은 손을 태연히 감추고 있는 대통령이라면 최루탄 없으면 단..

[안도현] 이 세상에 아이들이 없다면

이 세상에 아이들이 없다면 안 도 현 어른들도 없을 것이다 어른들이 없으므로 교육도 없을 것이다 교육이 없으므로 교과서도 없을 것이다 교과서가 없으므로 시험도 없을 것이다 시험이 없으므로 대학교도 없을 것이다 대학교가 없으므로 고등학교도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가 없으므로 중학교도 없을 것이다 중학교가 없으므로 국민학교도 없을 것이다 국민학교가 없으므로 운동장도 없을 것이다 운동장이 없으므로 미끄럼틀도 없을 것이다 미끄럼틀을 타고 매일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부신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안도현] 나무

나무 안도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나무가 버티는 것은 귀뺨을 폭풍한테 얻어맞으면서 이리저리 머리채를 잡힌 채 전전긍긍하면서도 기어이, 버티는 것은 자기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버티는 것을 이제 막 꼼지락꼼지락 잎을 내밀기 시작하는 어린 나무들에게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훗날 이 세상을 나무의 퍼덕거림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버티는 게 나무의 교육관이다 낮은 곳을 내려다볼 줄 아는 것, 가는 데까지 가 보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온몸으로 가르쳐주며 나무는 버틴다 나무라고 왜 가지가지 신경통을 모르겠으며 잎사귀마다 서러움으로 울컥일 때가 왜 없었겠는가 죽어버릴 테야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 휘저어 보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트럭을 탄 벌목꾼들이 당도하기 전에 그냥, 푹 고꾸라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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